엄마의 텃밭, 감사 그리고 흔적들 202

하루 일꾼

고구마 캐는 날. 손가락 골절로 수술받은 일꾼 남편 대신 지인이 고구마밭 일꾼으로 차출되었다. 10 이랑 정도의 밭이라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쉬엄쉬엄 놀이 삼아 하겠다는 마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다가 5분도 되지 않아, 이게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게 텃밭 일. 아마, 함께 한 지인께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터이나, 씩씩하게 고구마줄기를 걷어내고, 자리잡고 앉아서 고구마를 캐기 시작하는데 고구마가 앉아있는 모양이나 깊이가 불규칙해서 호미로 땅을 파고, 긁고, 쭈그려 앉았다 땅에 털썩 앉았다, 의자 놓고 앉아 캐고 또 캐는데 참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 나는 지인과 함께 고구마를 캐다가, 솎아서 씻어 소금에 절인 무청을 뒤집어 놓고, 재빠르게 주방에 들어가 김치 담글 풀을 쑤고, ..

텃밭이 베푼 은총

폭염이 가신 9월 이후, 엄마 집 텃밭의 주인공이 고구마에서 무로 교체가 되었다. 밭에 무 모종 하나씩 심는 이웃에 반해, 엄마는 무씨를 뿌려 배추 김장을 하기 전까지 솎은 무청으로 몇 차례 무청 김치를 담가 먹는 것을 선호하시는데, 마침, 추석 전 주에 동생이 내려와 어린 열무만큼 자란 무청을 솎아 풋고추와 배를 갈아서 담백한 파란 물김치를 함께 담갔다. 엄마의 기력이 작년만 못하신듯 한데도 텃밭 채소를 대하는 자세는 여전히 열정적이셔서 엄마의 마음이 가는 대로 내 몸을 조금 더 움직이자 맘을 먹고 있는데, 하늘이 내리는 물과 땅이 내는 양분을 먹고 쑥쑥 자라는 무를 지근거리에서 보면서 살뜰하게 조리해 맛있는 청정 음식으로 먹을 수 있는 건 경이로운 텃밭 생활이 베푼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늙은 호박 5개

혹독한 태양빛과 지루한 장맛비를 번갈아 맞아가면서도 구순 노모의 텃밭 울타리에 늙은 호박 5개가 노랗게 익어 간다. 텃밭 주인의 오남매에게 하나씩 나누어 줄 귀한 호박들이다. 애초에 호박구덩이 몇 개를 파고 그 안에 3-4개 씨를 넣어 호박을 키우는데, 시간이 흘러 잎이 무성해지면서 꽃이 핀 후 그 끝에 달리는 애호박들을 그대로 둔다고 늙은 호박이 되는 게 아니다. 울타리에 매달려 있는 호박이 자라면서 무거워지면 호박 줄기가 호박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끊어지는 경우가 다반사고, 호박이 땅에 닿아 습기 때문에 상하는 경우도 있어, 오 남매에게 하나씩 줄 요량으로 키우는 호박이 예쁜 노랑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끝까지 떨어지지 말고 잘 익기를 바라는 노모의 마음을 읽을 때면 때로는 애잔하고 때로는 절절..

수상한 새싹들

강렬한 빛의 여름꽃들이 점차 마지막을 향해 달리는 중에 이미 씨앗을 만든 후 뽑힌 봉숭아밭에 새롭게 봉숭아 새싹이 올라오고 있다. 씨앗이 자라 꽃을 피우는 것을 보는 것은 무척 고마운 일이나, 내년에나 올라와야 할 싹들이 때도 모르고 올라오는 건 어째 수상쩍다. 날도 모르고 올라오는 봉숭아 새싹 무더기를 보는 순간, 이상 기후 영향이 내 코 앞에 닥쳐왔음이 실감이 나 마음이 살짝 내려앉는다. 텃밭 주인은 야리야리한 아기 봉숭아잎을 보면서 이 가을에 꽃까지 피려나 하시는데, 난 수상한 봉숭아의 징조가 훗날 내가 하늘에서 내려다볼 때 내 자손의 세상이 존재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 두렵기도 하다. 지구촌의 각 나라에서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할 전략을 짜 2050년까지 탄소중립 시대를 열겠다고 계획하..

무밭은 땀밭

바깥 기온이 여전히 30도를 웃도는데도 텃밭 시계는 가을을 향해 달려, 8월까지 호박 넝쿨로 가득 찼던 호박밭이 9월 초 말끔한 무밭과 골파밭으로 바뀌었다. 물론, 거저 된 것은 아니고 엄마와 남편, 나의 땀방울 한 광주리 정도가 쏟아진 후에 만들어진 새 밭으로, 엄마도 혼자 하실 엄두를 못 내시지만, 사실 우리도 엄마 없이는 할 수 없는 고강도(?) 정리 끝에 만들어진 땀밭이다. 여름 내내 호박을 만들어내던 이 밭에서 이제는 가을부터 초겨울 무를 뽑을 때까지 열심히 솎고 다듬어 나물부터 김치까지 자꾸자꾸 만들 시간이 다가온다. 무청이 자라면서 더위도 점차 수그러들테니, 텃밭의 변신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텃밭 시계만큼 정확한 세월 시계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듯한데, 밭을 가꾸는 일은 힘이 들지만, 금방 ..

엄마의 두 마음

토요일 오전, 교회 일이 조금 늦게 끝나 부리나케 달려왔어도 오후 2시 반. 벌써 한 달 전부터 8월 마지막 주에는 호박 덩굴을 다 걷어내고, 무씨 뿌릴 작업을 해야 한다고 무언의 압박(?)을 주신 엄마가 우릴 무척 기다리셨을 터. 남편과 나는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그 참 호박밭에 들어가 씩씩거리며 덩굴을 걷어내는데, 엄마가 나오셔서 호박덩굴에서 쪄 먹을 호박잎을 떼어내신다. 고구마로 점심을 먹은 남편이 갑자기 허기진다고 시원한 물과 먹을 것을 갖다 달라며 잔디밭에 벌렁 드러눕는데, 이 모습을 본 엄마가 혼잣말을 하신다. '내년에는 텃밭에 아무 것도 심지 말아야겠다... 최서방도 저렇게 힘들어하고... 근데, 저거 놀리면 잡초만 생겨서 텃밭이 너무 지저분해지는데... 내가 기운이 달려서 예전처럼 못하겠고...

폭염에 죽은 나무

연일 지속되는 폭염에 지구가 끓고 있다. 하와이와 캐나다에서는 많은 사상자를 낼 정도의 엄청난 산불이, 파키스탄이나 인도에서는 심각한 폭우로 지구촌 어디든 편안한 곳이 없을 지경이다. 높아진 해수 온도로 빙하가 녹아내려 곧 지구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벌써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체감하지 못하다가, 얼마 전, 올봄까지 열매를 따 먹었던 멀쩡한 앵두나무가 누렇게 죽은 것을 보니 갑자기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구순 노모는 나무가 죽은 게 몹시 서운했는지, 차라리 베어버리면 좋겠다고 하시는데, 나는 엄마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라고는 하시면서도 혹시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 위축되지 않으셨을까 잠시 걱정이 되었다. 그 순간, 남편이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얼른 나무를 베러 나갔다. 사실 난, 나..

감나무 받침대

엄마가 이곳에 이사 오신 몇 해 뒤에 심은 아기 감나무가 어른이 되어, 올해 유난히 크고 튼튼한 감이 많이 열렸다. 엄마의 최애(最愛) 나무라, 우리도 방문할 때마다 열심히 보살피는 중인데, 감이 점점 커지면서 가지가 아래로 축축 처져 있는 것을 남편이 발견하고 얼른 나무 받침대로 지지해 주었다. 사실, 감나무 가지는 단단하지 않아서 웬만한 힘에도 잘 부러지는터라 감이 떨어지지 않고 잘 자라는 모습만 봐도 흐뭇해하시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린 남편이 빠르게 취한 조치로, 어르신을 잘 모시려는 그의 배려가 참 고맙다. 작은 받침대 하나로 감나무가 도움을 받고, 감이 달린 가지가 꺾일 걱정을 던 엄마도 마음을 놓으시고, 스스로도 뿌듯한 남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보며 고마움을 느끼는 나. 작은 배려가 긍정적으..

똘기와 도사리

강력한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지나간 후 주말. 태풍으로 인해 엄마의 보물인 감나무의 감이 많이 떨어졌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었는데, 마당에 보이는 감 도사리(=떨어진 낙과의 뜻을 가진 순우리말)가 겨우 1개뿐이다. 예년 같으면, 작은 바람만 지나가도 후드득 감이 떨어져 자식에게 나눠 줄 감이 적어지면 어쩌나 걱정하시는 엄마의 모습이 먼저 보이곤 했다. 올해는 두 그루의 감나무에 감이 무척 많이 달려 대부분의 가지가 아래로 축축 쳐진 상태. 오고 가며 봐도 신통한 굵직굵직한 감 똘기(=가지에 붙어 있는 덜 익은 과일의 뜻을 가진 순우리말)들의 표면에 노란색이 입혀지고 있어 올 가을 수확의 시간이 기다려진다. 삭은 소똥을 퍼 날라 거름으로 주었던 텃밭 집사 남편의 수고와 자식들을 챙기고픈 노모의 기도에 ..

호박 잎 한 쌈

몹시 더운 날. 바로 딴 호박잎을 깨끗이 씻어 찜기에 찌고 갓 딴 호박에 새우젓 넣고 볶고, 역시, 갓 딴 보라색 가지를 쪄서 깨소금 넣고 무치고, 또 갓 딴 풋고추 한 주먹을 밀가루 묻혀 쪄 낸 후 양념장으로 무치고, 지인이 건네준 고추 다데기와 집된장 쌈장으로 맛있는 호박잎 쌈밥을 먹었다. 고기 한 점 없어도, 밥을 넣지 않아도, 엄마의 텃밭 작물이 총 출동한, 한 여름 최고의 한 끼. 호박잎 한 쌈에 폭염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