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텃밭, 감사 그리고 흔적들 202

완두콩 노굿

요즘 엄마 텃밭 울타리 주변에는 하늘의 비를 맞고 넝쿨을 만들어 무럭무럭 키를 세우는 완두콩이 한창이다. 얼핏 보면 그저 그런 평범한 넝쿨 식물 정도로 보여 매해 그 자리에서 자랐지만 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었는데, 지난 주 유난히 뿌연 하늘빛 아래, 바람에 살랑거리는 순백의 작은 꽃들과 눈이 마주쳤다. 어라, 공작새 깃털 같은 날개가 달린 흰색 주둥이가 내게 말을 걸어오네... 참 말 잘하게 생겼군... 곳곳에 핀 작은 완두콩꽃의 소리 없는 소리가 진하게 느껴졌다... 근데 이제껏 말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을까? 알았어... 미안... 가만히 살펴 보니, 여리디 여린 작은 아가의 살결처럼 얼마나 보드랍고 하얀지... 이런 걸 청초하다고 하나? 여린 몸매라 살랑바람에도 꺾어질 것 같은데, 바람에 몸을..

미안한 마음

담벼락 뒤, 햇볕도 잘 들지 않고 눈길 주는 이도 없는 자갈밭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얼핏 보면 그냥 비슷비슷한 잡초들 같은데, 자세히 보면 대부분이 먹을 수 있는 산채들이다. 입이 넙적하고 줄기가 굵어 6월쯤이면 다 베어 먹을 수 있는 줄기를 내는 '머위', 돌밭에 거친 뿌리를 박고도 여리하게 올라오는 갸름한 '취나물' 잎, 머위와 취 사이에서 햇빛을 받겠다고 쑥 올라온 '부추'도 간혹 보인다. 뒤란에는 가을에 필 국화 줄기가 씩씩하게 올라오는데, 그 사이에 뿌리를 박고 국화보다 더 많이 햇빛을 쪼이려고 훌쩍 커 버린 '취나물'도 있다. 또한 자갈밭 사이의 작은 텃밭에도 연세드신 주인이 미처 돌볼 겨를 없는 중에도 스스로 씨를 퍼뜨려 왕성하게 올라오는 '중국 갓' 새싹들로 가득하다. 사람의 시선이..

늘 그렇듯, 텃밭 모종

오늘 밤에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시는 엄마에게 새 날은 또다시 힘껏 살아야 할 생명의 날이라시며 심장, 신장, 허리, 관절 등 어디 한 곳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음에도 매일을 계획하고 매시간 허투루 보내시질 않는다. 그중 텃밭은 엄마의 시간과 가장 밀착되어 있는 곳. 본인이 잡수려고 모종을 심기보다는 때에 맞춰 각종 작물을 심어 놓으면 누구든 가져다 먹겠거니 생각하고 가꾸신단다. 지난주도 우리가 방문하는 전날 하루종일 걸려 고구마 모종을 심을 두둑 8개를 만들어 놓으셨기에 온천욕을 다녀오면서 고구마, 토마토, 가지, 고추 모종을 사 와 남편과 함께 열심히 심으셨다. 모종 심기가 끝나고 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모종을 다 심어 놨으니 오늘 밤도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겠다... 고맙다...' 사실, 우리는 그..

서글픈 마늘대

작년 마늘 심을 때 5살과 3살 배기 손주들과 함께 놀다 심다 하다 보니, 마늘 심은 두둑 하나에 시금치씨도 같이 뿌린 모양이다. 얼까 봐 겨우내 비닐옷을 입혔다가 봄이 되어 열었는데, 마늘과 시금치가 뒤범벅되어 자란 두둑 하나를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던지. 같은 종자의 마늘인데도, 시금치와 영양분을 나눠 먹은 마늘대의 키가 현저히 작고 갸날프다. 엄마랑 얼른 시금치를 모두 뽑아주었음에도 성장 속도가 늦어 텃밭 주인의 애를 태우고 있다. 덕분에 씨 뿌리는 노동을 제공한 나 역시 연약한 마늘대를 보면 애처롭고 미안해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인데, 제대로 된 마늘을 만들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 엄마 집 갈 때마다 물도, 눈길도 더 주는데 도무지 옆 두둑의 친구들 체격을 따라가지 못한다. 대학원 석사 과정 시절,..

천국(?) 밥상

지난주, 엄마 텃밭에서 어린 머위잎, 쑥 그리고 질경이와 시금치를 조금 뜯어왔다. 봄 되면 으레 봄 향을 한 번쯤 먹어줘야 예의인 것 같아 이런 향내 나는 채소 밥상을 차리는데, 머위잎은 데치고, 질경이는 삶아서 참기름과 간장 양념으로 볶고, 쑥은 최소한의 밀가루와 소금을 넣어 노릇노릇 얇게 부쳐내고, 시금치는 콩나물과 파프리카, 양파, 달래 조금 넣어 새콤달콤 무쳤다. 마침, 지인 찬스 덕에 향긋한 당귀잎과 두릅까지 찬조 출연하여 훨씬 풍성한 향내 풀풀 나는 봄 상이 차려졌다. 마지막 남은 고추부각과 멸치볶음, 낙지젓, 무생채와 메추리알버섯조림 그리고 오이부추김치에 사태찜까지 적당히 올리고, 북어뭇국을 곁들여 올렸더니, 우와 이 정도면 시골 밥상 맛집(?) 정도 되는 비주얼. 봄 향기 먹고 싶어하는 지..

이웃 사촌

엄마의 텃밭이 조성되고 15년을 한결같이 같은 자리에 이웃해 있는 야생초들이 있는데 바로 머위와 돗나물(또는 돌나물) 그리고 산딸기다. 넘실넘실 넓은 잎을 가진 머위가 벽 주위로 떼를 지어 나는 사이 땅바닥에 낮게 누워 자라는 산딸기와 돗나물(또는 돌나물) 은 자리 다툼없이 적당히 섞여 머위 잎을 우산 삼아 열심히 크고 있는 중. 무슨 일인지 이곳에 다른 잡초는 얼씬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웃 사촌끼리 뭔가 동맹을 맺었나 보다. 머위는 벌써 어린 잎을 따, 두어 차례 쌈을 싸서 먹었고, 지난 주에는 엄마가 돗나물(또는 돌나물) 새싹으로 물김치를 만드셨다. 산딸기는 아직 귀여운 노란 꽃이 피고 있는 중이라 빨간 열매는 좀 더 있어야 볼 것 같은데, 여름철, 손주들의 텃밭 야생 놀이에 반드시 사용되..

때를 알기

앙증맞은 아가의 기도손 같은 튤립과 통통한 아기볼살 같은 명자나무의 꽃봉오리가 만개해, 아직도 싸늘하게 느껴지는 봄바람을 맞고라도 하염없이 들여다보도록 눈을 홀리고 있다. 1주일 만의 눈부신 변화. 하늘과 햇빛과 바람과 물이 주는 속 깊은 배려에 활짝 웃음으로 응답한 튤립과 명자나무꽃의 아름다운 성장이 참 기특하다. 혹자는 때가 되면 피는 게 꽃이라지만, 꽃 피울 때를 알고 있는 말 못 하는 저 꽃들이 참 부럽다. 현실을 딛고 살다 보니 멈출 때, 사랑할 때, 용서할 때, 기다릴 때, 침묵할 때 등을 잊어버려 혼돈의 시간을 보내기 일쑤인지라, 때를 알고 꽃을 피우는 저 꽃들이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드는 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질경이에게 배우다

봄이 되면 야생 들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산야초 중에 하나인 질경이는 연한 잎을 뜯어서 삶아 된장으로 무치거나 기름에 볶아 나물을 만들고, 때로는 살짝 데쳐 물기를 제거한 후 바람이 잘 통하는 응달에서 삐들삐들 말려 간장 장아찌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그런데, 엄마 집에 자리잡은 질경이는 쓰임새가 하나 더 있다. 수돗가 콘크리트와 텃밭 사이에 벽돌로 지지대를 해 놓은 곳이 있는데, 그 사이가 자꾸 들떠 쓰러지는 벽돌을 질경이 몇 뿌리로 벽돌을 지지하게 한 것인데, 이건 순전히 연로하신 주인의 아이디어이다. 질경이는 척박한 땅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려, 사람 발에 밟혀 잎이 상한다해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강인함이 있기에 텃밭 여기저기에 자리 잡은 질경이들은 모두 뽑혔지만, 요 지점의 질경이 몇 포기는 벽..

나물 캐는 노할머니

볕 좋은 주말 오후, 텃밭 여기저기에서 나오는 야생 봄나물 헌팅 시간이다. 쌉싸름한 머위 어린잎과 겨우내 추위 속에서도 실아남은 쪽파, 비닐 속에서 호사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노천에 드러나 추워서 부르르 떠는 얇은 시금치들, 그리고 5월 쯤이면 나리꽃 모양을 한 주황색 꽃이 필 원추리 새싹들을 조금씩 땄다. 쭈그리고 앉아 칼이나 가위로 일일이 잘라내야 하는 봄나물 채취는 우리 같이 관절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금지 행동인데, 봄을 싱싱하게 먹겠다는 일념으로 엄마와 나는 말도 없이 봄나물만 쫓고 있다. 머위잎이나 원추리 등은 지금 아니면 먹을 때를 놓치기에, 텃밭 구석구석을 뒤지는데, 사람 손 닿지 못하게 넝쿨 장미가 서 있는 울타리 너머에서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 원추리가 노모의 열심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물 주는 엄마

평생 자식들을 살피며 사셨던 엄마가 78세에 텃밭 딸린 이곳으로 이사 오시면서부터 살펴야 할 자식들(?)이 더 생겼다. 물론,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 보살핌이다. 비 올 땐 흙이 파일까 봐, 안 오면 목 마를까 봐, 바람 불면 얼까 봐, 이것저것 거둘 땐 버려질까 봐 늘 노심초사하시는데, 얼마나 식물들을 사랑하시는지, 텃밭이 정원 같다. 땅을 고르다 나오는 크고 작은 돌멩이도 엄마의 텃밭에서는 구역을 나누는 쓸모 있는 녀석들로 변신하고, 어디 선가 날아와 자리 잡은 잡초도 뽑지 않고 텃밭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하신다. 하얀 민들레와 질경이가 그랬다. 세상에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시면서. 이 자그마한 땅이 주는 사랑과 생명의 경이로움이 얼마나 큰지, 텃밭 식물이 자신이 낳은 사람 자식보다 더 큰 위로가 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