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텃밭, 감사 그리고 흔적들

늙은 호박 5개

신실하심 2023. 9. 1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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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태양빛과 지루한 장맛비를 번갈아 맞아가면서도 구순 노모의 텃밭 울타리에 늙은 호박 5개가 노랗게 익어 간다.

 

텃밭 주인의 오남매에게 하나씩 나누어 줄 귀한 호박들이다.

 

애초에 호박구덩이 몇 개를 파고 그 안에 3-4개 씨를 넣어 호박을 키우는데, 시간이 흘러 잎이 무성해지면서 꽃이 핀 후 그 끝에 달리는 애호박들을 그대로 둔다고 늙은 호박이 되는 게 아니다.

 

울타리에 매달려 있는 호박이 자라면서 무거워지면 호박 줄기가 호박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끊어지는 경우가 다반사고, 호박이 땅에 닿아 습기 때문에 상하는 경우도 있어, 오 남매에게 하나씩 줄 요량으로 키우는 호박이 예쁜 노랑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끝까지 떨어지지 말고 잘 익기를 바라는 노모의 마음을 읽을 때면 때로는 애잔하고 때로는 절절하기까지 하다.

 

자식이 뭐라고, 본인 몸 가누기도 힘드신 구순 노인이 환갑 전후의 자식들을 향해 이렇게 마음을 쓰시는가 싶다.

 

노모의 그 마음을 잘 알기에 엄마 집에 들어서자 하는 남편의 첫 행보는 언제나 호박 상태 확인하기다. 울타리 밖에 열린 호박이 있는지, 땅에 떨어진 것은 없는지, 익어가는 호박 중 썩는 것은 없는지 꼼꼼히 살핀다.

 

나의 경우, 늙기도 전에 떨어진 중늙은이 호박도 허투루 버릴 수 없어 껍질까고 속 파서 가까운 이웃들과 나누기도 하고 이런저런 반찬(볶음, 지짐, 찌개, 만두 속 등)을 만들어 끝까지 소비해 텃밭 주인의 알뜰함에 보답하고 있다.

 

노모의 절절한 자식 사랑이 호박에 쌓여가는 덕에, 울타리에 매달린 늙은 호박 5개가 아직까지 안녕하다.

 

올 가을, 형제들이 늙은 호박에 진하게 밴 노모의 사랑까지 먹고 엄마의 소원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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