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텃밭, 감사 그리고 흔적들 202

수상한(?) 꽃

몇 년 전만 해도 11월 중순이면 아침저녁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꽤 쌀쌀했던 것 같은데, 올해 11월은 새벽엔 섭씨 5~8도, 한낮 기온은 17~8도 정도로, 겨울로 들어서는 느낌이 별로 없다. 따듯한 날씨 탓에, 텃밭 옆에 묻어 놓은 서양채송화 한 송이가 다시 여름이 오는 줄 알았는지 방긋 웃으며 꽃을 피우고, 벌써 시든 백일홍 줄기에서 다시 작은 꽃이 피었다. 게다가, 고구마 캐고 난 후 심은 마늘밭에서는 마늘 싹이 다 올라와 겨울을 나게 할 비닐 옷을 어떻게 입혀야 할지 난감한 상황. 11월이 되도록 꽃을 보는 것은 좋은 일이나, 이렇게 작은 텃밭에까지 이상 기후의 그림자가 드리우니, 어째 심난한 위기 의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백일홍 꽃이나 마늘싹이야 자신이 처한 환경에 힘껏 반응한 것뿐이니 탓할..

여전한 자식 생각

사계절 내내 채소가 지천인 시대에 사는데도 불구하고, 올해도 엄마는 평생의 습관대로 김장거리를 마련해 늙은 자식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엄청 분주하시다. 비 온다는 예보에 내가 방문하기도 전에 무밭의 무를 모두 뽑아 정리해 50개씩 5 다발을 만들어 지하실 입구에 앉혀 놓으셨는데, 굽은 허리로 얼마나 힘들게 일을 하셨는지 입맛이 다 달아나셨나 보다. 그래도 자식을 위해 사는 게 힘이라시니, 굳이 막지 못해, 오늘도 엄마 명령에 따라 갓과 대파, 쪽파를 뽑아 오남매 몫으로 가지런히 정리하시도록 힘껏 도와드렸다. 현관 입구에 앉아있는 무청 시래기 다발이 여전한 엄마의 자식 사랑인 것 같아 뭉클한 마음이 드는데, 엄마의 살아있는 사랑이 내년에도 존재할 수 있도록, 형제들이 엄마께 폭풍 감사로 화답해 주었으면 좋겠다.

늦가을, 마늘 모종

'오늘은 할 일이 많다~~ 감도 따야 하고, 마늘도 심어야 하고...' 나를 보자마자 하시는 엄마의 말씀. '예~예~예~~~' 엄마는 우리가 방문하는 토요일이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미리 준비해 놓으시느라 이른 아침부터 무척 분주하신데, 이 날도 텃밭에는 심을 마늘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두둑은 며칠 전부터 엄마가 만들어 놓으셨고, 마늘을 심기 전 그 위에 상토를 뿌리는 일부터는 나와 남편의 몫. 연로하지만 노시는 법이 없으신 엄마의 진두 지휘 아래 나와 남편은 두둑에 상토를 뿌리고, 한 두둑 씩 맡아 마늘 심을 구멍을 만들어 한 알 씩 줄 맞춰 꾹꾹 심은 후, 흙을 덮어주면 되는데, 말이 쉽지 쪼그리고 앉아서 하는 일이라 십여 년 간 매해 하는 일임에도 아직도 일이 몸에 잘 붙질 않는다. 게다가..

어린 농부(?)

할아버지와 감을 따고 놀던 아가가 자기 눈에 포착된 파란 토마토를 따기 시작한다. 볕이 짧아져 더 이상 붉어지지 않는 녀석들이라 이제는 처리해야 할 때. 잘한다 칭찬해주니, 아장걸음으로 바쁘게 오가며 열심히 토마토를 따는데, 이에 질세라, 5살 손녀가 자기는 가지를 따겠다고 나선다. 기온이 떨어져 더 이상 살이 오르지 않는 녀석들을 대신 따 주는 어린 농부(?)가 무척 고맙다.ㅎ 어른들이 자리를 옮겨 마늘 모종을 심는 동안, 자기들도 장갑 끼고 나서서 밭 한 쪽에 앉아 흙장난에 열중인데, 아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축복하는 기도가 절로 나온다. 아가들아~ 앞으로도 지금처럼 바람과 하늘, 나무와 흙을 벗삼아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슬기롭게 경험하며 자연과 조화로이 사는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거라~~

감 따는 날

파란 하늘이 너무 예쁜 지난 주말, 드디어 감을 따라는 엄마의 명령이 떨어졌다. 일복으로 갈아 입은 남편이 사다리와 바구니를 준비해 놓고 감을 따기 시작하는데, 미국에서 잠시 들어온 5살, 2살 꼬맹이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돕는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바쁘다. 5살 손녀는 이미 할아버지가 딴 감을 받아 바구니에 넣느라 분주하고. 높은 곳에 달린 감을 따느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할아버지가 재미있어 보이는지, 2살 손자가 겁도 없이 사다리를 한발 한발 오르더니 거의 꼭대기까지 도착했다. 아래로 내려 놓으면 또 올라가기를 수 차례, 감 따는 것보다 사다리 타는 아기 손자 붙잡는게 더 힘들다.ㅎ 그러다, 아가가 갑자기 잔디밭에 벌러덩 눕더니, 때마침 부는 바람이 부드러웠는지 깔깔꼴꼴. 노할머니가 아가를 일으키..

마늘 모정(母情)

2008년, 엄마가 도시 생활을 뒤로 하고 텃밭 딸린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오신 해부터 매해 엄마의 중요한 일 중 하나가 김장 재료를 준비해 오 남매에게 골고루 나눠주시는 일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철이 다가오는데, 연로해지셔서 몸움직임이 느리다고, 10월 중순인 지금부터 오 남매에게 줄 김장 재료 준비에 맘이 분주하시다. 올해 작황이 좋지 않아 자식들에게 줄 마늘이 적다고 한 걱정하시면서, 아기 손톱보다 작은 마늘 한 톨도 버리지 않고 까고 또 까고. 벌써 3일째 까다 눕고 또 까시는 중.ㅠ 사실, 우리들은 엄마가 편히 계셨으면 좋겠는데, 구순 넘은 노모가 5, 60 된 자식들이 여전히 당신이 돌봐야 할 어린 자식이라 생각하시는지 굽은 허리에도 마늘 까는 손이 쉬질 않으시니...에휴... 다만, 엄마..

꽃을 보며 인생을 생각하다

덥든 시원하든, 땅에 뿌리를 박은 식물들은 계절의 순환에 맞춰 피고 지고 또 피는데, 같은 텃밭임에도 방문할 때마다 늘 새롭게 느껴지는 건 바로 시절을 좇아 모습을 보여주는 새로운 꽃들 때문일 거다. 10월 중순. 기온이 뚝 떨어져 최저 기온이 10도 안팎이 되니, 여름 내 피고 지던 꽃분홍 채송화의 초록 줄기가 꽃처럼 붉어져 올해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라지는 꽃대신 씨앗을 품고 조용히 내년을 기다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고춧대에 피고지던 손톱만 한 하얀 고추꽃도 그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어, 얼굴 한 번 보려는데 모두 고개 숙여 땅만 보고 있다. 할 수 없이 내 몸을 거의 땅에 대고 고추꽃을 훔쳐보는데 야무지게 붙어있는 5개 꽃잎이 얼마나 비단같이 투명하고 야리야리한지, 꽃이 만들어내..

고구마가 효자!

지난 주말, 내가 엄마 집 현관에 들어서는 것을 보자 엄마가 하신 첫마디. '얘~ 올해 고구마에 꽃이 피더니, 고구마 수확도 대박이다~~~!!!' 그리고는 여쭙지도 않은 고구마 수확 스토리를 줄줄줄 읊으신다. '고구마가 어찌나 많이 나오던지, 옮기려고 열 번 이상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엄청 고생했다... 다 들여다 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크기별로 분류하고 세어보니 400 개가 넘더라... 너희 5남매에게 넉넉히 나눠줄 수 있겠다...해마다 고구마를 심었지만 이렇게 잘된 건 처음이다..사위가 갖다 부은 소똥 때문인가...지력이 좋아졌나?...내년에는 어떨지 기대된다...' 사실 10여 년 동안 해마다 텃밭에 고구마 모종을 심었지만, 늘 고구마 줄기만 먹었기에 올해 역시 고구마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고, 그..

무가 자란다~

6월쯤 마늘을 걷고 난 텃밭이 두어 달 휴식기를 보낸 후, 단단해진 땅을 삽으로 퍼서 뒤집고 두드려 부드럽게 만들고, 삭은 소똥을 뿌려 흙과 섞은 후 예쁘게 두둑을 만드는 선 작업을 완료하면 다시 겨울 김장을 위한 무씨가 뿌려진다. 올해도 9월 초 무씨를 뿌리고 한 달 여가 지났는데 뽀얀 무가 흙을 뚫고 나오고 있다. 마치 아가 엉덩이처럼 보숭보숭,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사이, 무가 자랄 자리를 확보해주기 위해 열무처럼 자라고 있는 무청을 솎아 서너 번 김치를 담가 맛있게 먹고 있는 중인데, 해마다 비슷한 시기에 행해지는 같은 작업들이라 특별할 것도 없지만, 깨보다도 작은 씨앗에서 이리 틀실한 무가 만들어지는 것은 언제나 놀랍다. 평생 딛고 다니면서도 공기처럼 천지 사방에 있어 관심은 1도 없었던 '..

가을 텃밭 정원

구역별로 김장용 무, 대파, 쪽파, 고춧대, 가지, 상추, 고구마, 토마토, 호박 등이 씩씩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푸름이 가득한 가을 텃밭. 마치 홀로 사시는 구순 넘은 텃밭 주인을 성실하게 지키는 늠름한 청지기 같다. 장독대 옆에는 해마다 포기를 늘려 피는 노랑, 하양, 금홍색 국화 봉오리가 한가득 맺혀 있어 얼마 후 주인의 마음밭에 근사한 꽃다발을 안길 준비를 하고 있고. 이에 질세라, 화단 한 쪽에는 올해 처음 구근을 심은 다알리아가 자줏빛 큰 얼굴로 주인에게 강렬한 첫인사를 드린다. 동시에 주인 얼굴의 주름이 펴지면서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웃음이 슬쩍 지나간다. 여름 내 샛노란 꽃을 피웠던 백년초 줄기 끝에는 어느 새 빨간 열매가 달리고, 사이사이 안착한 돌나물(돗나물)도 건장한 백년초를 의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