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것이 싫지는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적당히 손 때가 묻거나 아님 나름의 history가 있는 물건들이다. 원래부터 물건 사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편이라 젊었을 때도 백화점 쇼핑은 즐겁지 않은 일 중 하나였다. 오히려, 엄마의 손 때 묻은 그릇이나 찻잔이 좋았고 한 번 산 것은 고장 나 버려야 할 때까지 쓰고 또 쓰는 터라 살림살이 40여 년 된 지금 집안을 둘러보면 대부분이 30년 이상 된 중고품뿐이다. 하지만, 내겐 물건 하나하나 나의 역사가 있는 것들이라 결코 버릴 수 없는 애착물이기도 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어린이 영어동화책들. 미국 유학 시절, 없는 형편에도 아이들 책 사주는 일 만큼은 꽤 열심이었는데, 큰 애의 경우 스티커 트리에 책 한 권 읽을 때마다 스티커 1개를 붙여 50개가 완성되면 본인이 원하는 변신 로봇 1짝씩 살 수 있다는 나의 제안에 이 책들을 보고 또 보며 스티커 트리를 완성해 가곤 했다. 250 권 정도 읽어야 변신로봇 완전체 하나를 살 수 있었는데 이런 로봇 세트가 수십 개가 있는 걸 보면 어린 시절 큰 애가 읽었던 책의 숫자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덕분에 큰 애는 커서도 학과 공부는 안 해도 학교도서관의 대부분의 책들을 씹어 삼킬 정도로 읽었다고 하니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사방이 지천인게 책이지만, 나의 어린 시절엔 지금과 같은 환경이 아니어서 한글은 떼었지만 읽을 책이 없어
예전에 엄마가 읽으셨다던 '청춘극장', '상록수' 등의 성인 소설을 무슨 뜻인지도 모르며 이불 뒤집어쓰고 밤새 읽었던 기억이 난다. 불 끄고 자라는 엄마의 불호령을 들을 때까지. 결국 난 초등 3학년부터 눈이 나빠 안경을 쓰게 되었지만 책만큼 재미난 물건이 없었고, 또 엄마의 통 큰 구매 덕에 세계문학전집 같은 것을 초등, 중등 시절 열심히도 읽었다. 이것도 아마 나의 엄마가 보여주신 맹모삼천지교 같은 걸 거다. 엄마의 손에도 언제나 책이나, 신문 등이 들려 있었으니까.
그래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이사하면서도 나의 아들이 읽고 자랐던 동화책을 고이 모셔와 언젠가 가정을 이뤄 자녀를 낳고 그 애가 책 읽을 때가 되면 자기 아빠가 읽었던 책을 읽으며 또 아름답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새 그런 날이 성큼 다가온 것. 8살짜리 큰 손녀가 자기 아빠가 어릴 적 읽었던 책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얼마나 반가운지. 더듬더듬 읽어 내려가는 아이의 책 읽는 소리가 너무 명랑하게 들려온다. 그렇잖아도 세 자녀들이 모두 출가했기에 짐들을 정리해 각 집으로 보내려 한 참이었다. 많이 낡긴 했지만, 제 아빠가 읽었던 책을 따라 읽으며 그 나
이 적 자기 아빠가 느꼈을 책 속의 영감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30여 년간 보관해 온 이 책들의 사명, 그리고 나의 할 일을 다한 게 아닐까 한다.
나의 엄마가 내게 전해 주셨던 삶의 history가 내 아들에게, 또 그 자녀에게 유전되면서 책이 주는 선한 아이로 자라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