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으로 ~

닮고 싶은 어른... 엄마...

신실하심 2020. 1. 9. 12:51
728x90


 

 

 

 

 

종가댁 큰며느리셨던 외할머니의 삶이 너무 고되 보여, 자신은 무조건 막내며느리로 시집가겠다던 친정엄마. 여기저기 들어오는 혼사 중 맏며느리는 모조리 골라내고, 양반을 따지셨던 엄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큰아버지가 서로 혼사를 맺자고 약조하셨다며 신랑을 소개했는데, 가난하지만 막내아들이라는 이유를 들어 결혼하셨다는 친정엄마.

 

그런데, 웬걸. 내가 아는 한 막내 며느리였지만,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늘 우리 집에서 사셨고, 치매로 똥질까지 하셨던 두 분의 마지막 임종까지 20여 년을 삼시세끼 밥상 올리며 섬기셨던 엄마다. 그래서인지 당신의 딸들에겐 장남, 막내 가리지 말고 사람 인격보고 데려오라셨는데, 4딸들 모두 엄마처럼 시부모님을 모셨다. 막내 며느리로 시집갔어도.ㅎ

 

학교 갔다 돌아온 어느 날엔 소주 한잔 잡수시던 엄마. 자식도 마다하는 어른의 아랫도리 처리 후 냄새가 너무 역겨워 술마시면 나을까 해서 잡쉈다고. 그런 세월 중에도 자식이 무서워 한 말씀도 못하고 꼼짝없이 시부모를 섬겼다는 엄마. 지금 세대에겐 도무지 상상도 안되는 그림이지만, 사실 그랬다. 세탁기도 없던 시절이라  추운 겨울에도 똥질한 이불을 손으로 빨아야 했던 엄마가 너무 가여워, 어쩌다 가끔은 나도 거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업 실패가 잦았던 아버지 대신 오남매의 교육을 책임지시느라 늘 피곤하고 고단했던 엄마의 손과 발. 그 와중에도 자신으로 살고픈 맘을 갖고 계셨던지 틈틈이 서예와 동양자수, 각종 소설, 역사서를 탐독하셨던 엄마의 과거를 맏딸인 나는 꽤 많이 알고 있다. 

 

옛날 이야기나 역사의 언저리에 있던 야사 등에 능통하셨던 엄마는 손주들을 재울 때면 맛깔나는 이야기 솜씨로 적어도 세번 이상은 반복해야 끝나는 '천기띠기' 같은 옛이야기를 밤새 들려주시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들었던 똑같은 얘기임에도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그 얘기들을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찌 들을까 싶어 형제들은 녹음해 두기도 했다.

 

늘 아껴 쎠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엄마 덕에 아나바다 운동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우리집엔 아나바다가 이미 시행되고 있었고, 나날이 자라는 자식들이 춥지 않도록 긴긴 겨울엔 작아진 스웨터 털실을 풀어 다시 떠서 입혀주셨던 엄마. 그 엄마가 지금은 스웨터를 풀어 체격에 맞게 다시 떠서 입히시는 재능 기부(?)를  동네 어르신들에게 하고 계시다. 

 

엄마 손만 지나가면 뭔가가 새로 만들어지고, 헌 것이 새것이 되는 매직 손. 집안 텃밭에서 재배된 못생긴 채소들을 잘 정리해 이웃에게는 깔끔하게 제공하시는 엄마. .

 

꼬부라진 허리지만, 하루 24시간을 결코 헛되게 방치하지 않으시는 엄마. 자식에게 폐끼치지 않겠다며 아무리 입맛이 없어도 삼시세끼를 규칙적으로 드시고, 성경 읽기, 기도로 시작하는 새벽 시간부터 청소, 화초관리, 그림그리기, 자식들이 맡긴 옷 수선, 독서, TV 시청, 치매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늘 해오시는 화투로 숫자띠기 등 저녁에 잠자리에 드실 때까지 엄마의 하루는 스스로 계획한 스케쥴대로 움직이신다.

 

그 뿐인가, 엄마의 탁상 달력엔 그날의 일들이 빼곡이 기록되어 있어 누가 방문해도 엄마의 일상을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다. 

 

그 엄마가 작년 12월에 88세, 미수(米壽)를 맞이하셨다.

 

직계 자손 33명(당신의 5남매 부부 10명, 손주 및 손주 사위, 손주 며느리 15명, 증손주 8명) 중 해외에 있는 자손들을 제외하고 모든 직계 자손들이 성환 엄마 집에 모여 조촐하지만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간 엄마가 그리셨던 수채화 작품으로 2020년 탁상 달력을 만들어 자손들이 나눠 갖고, 일부는 인터넷에 사연을 올려 판매한 후 순수 이익 39만 여 원을 사정이 딱한 어느 보육원에 엄마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였고.

 

이런 모든 일들이 엄마가 뿌린 애씀이라는 씨앗의 열매라고 생각되는데, 탁상 달력 제작과 기부 등이 각자의 특별한 재능이 있는 손주들이 서로 힘을 합해 함께 만들어간 작품이니 그만하면 한 때 고단하고 애처러운 세월이 있었을지라도 말년을 천국같은 삶이라고 스스로 고백하시는 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빚어진 삶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 역시 점차 엄마의 시간을 쫓아가고 있는 처지인지라, 엄마의 삶을 따라가며 닮고 싶은 어른인 그녀처럼 살고싶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가족으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엄마에 그 딸...위대한 유전자  (0) 2020.05.12
손녀들과 요리놀이~  (0) 2020.02.11
4대가 함께 한 여행  (0) 2020.01.02
귀여운 스토커  (0) 2019.08.08
손녀의 보물  (0) 2019.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