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갑자기 몰려온 태풍 링링이 엄마 집 텃밭 작물에도 영향을 줘 무더위를 이겨내고 싱싱하게 뻗어나가던 호박 넝쿨을 강타했다. 너울거리던 호박잎이 모두 바람에 시들어 말라 떨어지고 누렇게 익어가던 호박들은 남아있는 줄기에 겨우 달려있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 그래도 조금더 버텨서 완숙된 늙은 호박이 되라고 아침 저녁 기도하던 중 작은 바람 한 방에 울타리 뒤쪽에 매달려 있던 호박 2개가 밑으로 떨어졌다.
엄마집 주변엔 워낙 호박들이 많아 이웃들 누구도 남의 집 호박을 넘보지 않는 터라, 자기 집 소출은 어떻게든 본인들이 해결하는 것이 암묵적인 원칙인 듯. 원래 가느다란 파 한 잎도 함부로 버리시지 않는 엄마가 떨어진 호박을 씻어 부엌으로 들여 어느 새 껍질을 벗기고 속을 파내 호박육을 다듬고 계신다. 허리가 구부러져 서서 하시는 일은 힘들어 하시지만 앉아서 하시는 일은 나보다 더 끈질기게 잘 하신다. 하지만 딱딱한 껍질을 둟고 잘라내 껍질을 벗겨내는 작업이 얼마나 힘든지는 해본 사람이면 대충 알 터. 많은 이들이 호박죽이 먹고 싶어도 다듬기 어려워 망설이는 것을 생각하면 구순 노모가 팔걷어가며 늙은 호박 두개를 다듬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지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옆에서 텃밭에서 솎아온 무청으로 김치를 담느라 정신이 없어서 노모의 호박 다듬는 일을 도와드릴 수가 없었다. 좀 있다 내가 하겠다 해도 너나 나나 힘드는 것은 같다면서. 씻기만 하면 먹을 수 있게 깨끗하게 발라낸 호박육, 그리고 그 속의 씨를 분리해 호박육은 주변 이웃들과 나눠 먹으라고 봉지 봉지 싸 놓고 분리시킨 호박씨는 깨끗이 씻어 햇빛에 말린 후 껍질을 까 멸치볶음용 견과류로 사용하실 터다.
해마다 이렇게 서너 번씩 수십 개의 호박을 정리해 주시는 덕에 내 주변 사람들이 편하게 늙은 호박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올해도 호박 정리 시즌이 이제 시작됐으니 11월까지 또 여러 번의 정리된 호박육이 나뉘어질 것이다.
엄마 왈,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성의껏 깨끗하게 정리해 먹을 수 있게 나누는 것이 주는 이의 도리라신다.
오늘도 텃밭을 통해 엄마와 사람사는 도리를 학습하는 나는 여전히 엄마의 어린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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