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열전
지금은 싸게 사 먹을 수 있는 간편식 1위인 김밥이지만, 내 기억 속 김밥은 일 년에 한두 번 봄과 가을 소풍에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지금처럼 훌륭한 가정 조리대가 있는 게 아니기에 젊은 시절의 엄마는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 재료를 준비해 아궁이 연탄불 위에서 재료를 볶고, 그다음 밥을 한 뒤, 김을 살짝 구워 김밥을 만들 때가 되면 나와 동생들이 눈 비비고 일어나 엄마가 만든 김밥의 꽁댕이 하나 얻어먹으려고 엄마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어쩌다 한 개 얻어먹은 김밥 꽁댕이가 어찌나 맛있었는지. 그래서 우리 오 남매는 소풍날만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영양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또 영양학을 가르쳤던 터라 건강에 좋은 다양한 재료의 음식을 먹고(또는 먹이고) 비만하지 않은 몸을 유지시켜야한다는 나름의 신조(?)를 갖고 있기도 했고, 하루에 30가지 이상의 식재료를 먹도록 가르치고 있었기에 (물론 양과는 상관없이) 나뿐 아니라 가족들에게 다양한 식재료를 경험하게 하는 일에 꽤 열심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3남매 양육하고 학위 과정도 밟으면서 대학 강의도 해야했던 내게 김밥은 매우 유용한 레시피였다. 새벽 첫차 타고 서울로 강의받으러 가기 전, 4 식구의 김밥 도시락을 싸고 아침 상을 차려 놓고 메모 한 줄 남긴 후, 정신없이 역으로 달려가던 그때 내가 먹을 아침도 김밥 1줄이었다.
마땅한 식사거리가 생각나지 않을 때, 비빔밥 해 먹고 남은 나물들을 보며 같은 재료로 김밥을 만들어 먹으면 색다른 맛이 나서 나물 김밥을 만들어 먹었다. 마치 국밥을 해 먹었는데, 같은 국밥을 다시 먹고 싶지 않을 때 국밥에 나물 몇 가지 얹어 먹으면 색다른 맛이 나는 것처럼. 애들이 어렸을 때 새로운 음식을 경험시키고자 재료를 보이지 않게 다지거나 다른 재료와 섞어서 주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먹곤 했는데, 그때도 가끔씩 사용했던 레시피가 김밥이었다. 그 덕인지 세 아이들은 음식에 대한 편견 없이 아무거나 잘 먹으며 성장했다.
이런 세월이 어언 30여 년이 지나고 보니, 내게 김밥이란 단무지, 시금치, 햄, 계란 등이 고정 출연하는 김밥에 머물지 않는다. 재료를 보면 함께 먹었을 때 어떤 맛감일지 어느 정도 느껴진다고나 할까(?) 사실 한국인들의 음식은 서양 음식과 달리 밥과 반찬, 국 등이 함께 들어가 입에서 씹으면서 어우러지는 맛을 즐기게 되어 있기에, 김밥이 주는 다양한 재료들이 함께 씹히면서 제공하는 맛있는 맛은 한국인 밥상의 기본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나의 손을 거쳐 간 김밥의 종류는 여느 김밥집 김밥 메뉴보다 훨씬 다양하다. 시래기 김밥, 치킨가스 김밥, 나물 김밥, 불고기 김밥, 월남쌈 김밥 등등.
이번에는 지인이 준 무 짠지와 된장 무 장아찌로 김밥을 만들었다. 무짠지 1개를 김밥에 넣을 길이로 썰어 물에 반나절 담근 후 물기를 꼭 짜고 다시 설탕을 뿌려 한 시간 정도 재운 후 물기를 짰다. 된장 무장아찌 역시 된장을 물에 깨끗이 씻은 후 채 썰어 물에 1시간가량 담근 후 물기를 짜서 갖은양념으로 무쳤다. 그냥 밥반찬으로 먹어도 꽤 맛나다. 냉장고에서 엊그제 볶아 먹은 어묵 잔반과 우엉조림, 시래기나물(우리 집에 늘 있는 나물), 떡갈비 1조각(김밥에 모자라면 볶아놓은 소고기 불고기를 쓸 참)을 꺼내고 계란 2개를 급히 부쳐 잘랐다. 10여 분 만에 남편과 나 둘이서 먹을 3줄의 김밥이 완성되었다. 밥과 반찬으로 먹을 때보다 김밥을 끼니로 하면 한 번에 먹는 밥(쌀) 양이 2배 정도 되기는 하나 늘 그렇게 먹는 게 아니니 맛있게 먹기로 했다. 이 날은 김밥과 미역국 그리고 심심한 얼갈이 국 김치로 저녁 식사를 훌륭하게 해결했다.